이것만큼 멋진 지옥이 없다고 생각한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 듯 그 끝은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
빛도 없는 수면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욕을 해야하는지 아님 병신처럼 실실 웃어야 하는지 버키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랫동안 감았던 눈은 각막을 찢는 빛을 받아드리기 위해 눈꺼풀을 몇번이나 깜박였다. 손을 들어보는데 양손이 들렸다. 왼손은 투박했던 과거의 손과 다르게 좀더 정교했고 사람팔 같은 인조피부까지 덮혀있었다. 놀라 몸을 일으키자 흐릿하지만 바쁘게 움직이던 인영이 멈춰섰다. 버키도 반쯤 일어난 상태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어정쩡하게 힘든 상태에서 멈춘 버키와 다르게 상대방이 더 빠르게 다가왔다. 이리저리 몸 상태를 보는 손길이 무슨 고기 품평하듯 거친 손길이였다. 버키는 반항도 항의도 없이 멍청하게 끌러다니고 있었다. 아마 일반 연구진이나 의사였음 나름 눈썹을 찌푸리며 몸에 힘을 줘 항의를 했겠지만 지금 자신의 상태를 봐주는 사람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서로 피터지게 싸웠던 토니 스타크 였다.
"뭘 멍청하게 있는거야. 세뇌군인"
토니와 화해 한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자신을 살짝 내려다 보는 큰 갈색눈은 차갑고 약간의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버키는 그 눈에 충분히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오래 쳐다볼 수 가 없어서 시선을 내렸다. 어느 새 자신은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는지 흰 환자복이 연구실 조명 빛 때문에 너무 밝아 보였다. 삐빅 등 뒤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가 들어왔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와칸다의 왕복을 입은 남자. 와칸다의 국왕, 트찰라 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반즈?"
"이게 무슨 일이 인지...?"
"말하자면 길어요 반즈. 일단 당신의 세뇌코드를 해제하지 못해서 미안하군요"
"네? 그럼 왜....스타크가..."
"이봐 세뇌군인. 궁금한게 참 많겠지만 이렇게 미적될 시간 없거든? 당장 일어나서 옷갈아 입어"
버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불쾌하다는 듯 말이 체 끝나기도 전에 토니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국왕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오히려 버키의 얼굴 위로 궁금증만 온전히 떠올리게 만들었다. 국왕은 버키의 앞에 평범한 후드티와 물빠진 청바지와 운동화를 내밀었다. 버키는 이번 만큼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국왕을 쳐다봤다. 국왕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한마디 운을 띄었다. 호롱불 같은 말 한마디 였지만 그 말한마기에 버키는 불길에 휩사였다.
"로저스가 사라졌어."
그가 냉동기계에 들어가고 딱 1년을 채웠을때 스티브는 드디어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피를 토했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도 못들어오게 했던 방안에 침대 커버와 러그 몇번이나 락스로 닦았지만 혈액 반응 약물에 나타나던 피들이 스티브 로저스가 그간 독으로 변한 슈퍼 솔져 혈청과 엄청난 전쟁을 치뤘다는 흔적들이 곳곳에서 등장했고 결국 처음부터 나약했던 스티브 로저스의 몸이 백기를 들었다고 했다. 백기를 든 몸은 빠르게 망가져 갔다. '나보다 가슴이 크단 말이야 스티브' 장난스레 말하던 나타샤의 말따마 멋진 대흉근을 자랑하던 근육질 몸은 근육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모든 체지방을 쭉쭉 빼내었다. 와칸다는 하루내리 무너져가는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에 비상이 걸리고 실험실 같은 1인실에 강제로 그를 눕혔다.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로저스를 붙잡고 억지로 피를 뽑고 연구를 했지만 10년동안 안에 있던 혈청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어벤져스 탑안에 홀로 남은 토니 스타크에게 연락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휘몰아치는 사건들은 1년하고도 3개월이 조금 흘렀다.
버키는 자신이 어떻게 브루클린에서 치안이 안좋기로 소문한 길거리 위에 서있는지 몰랐다. 피를 토한 이후로 모든 검사와 약을 거부하던 스티브는 급기야 토니 스타크가 오자마자 그가 타고왔던 헬기를 가지고 도망쳤다고 했다. 대체 왜? 버키는 당장이라도 뭐가 무서워서 도망쳤냐고 스티브의 어깨를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 집이야' 이어폰을 한쪽에 낀 상태에서 나타샤의 말을 따라 다 무너져가는 벽돌집 앞에 말걸음을 멈췄다. 뇌가 뒤흔든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그 집은 버키가 강제징병을 당할때까지 스티브와 살던 원룸과 똑같았기 때문이였다. 마지막까지 그 때를 그리워하는 스티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버키는 왠지 소리치고 싶은 입을 꾹 다물며 무작정 그 집에 들이닥쳤다. 삐그덕 삐그덕 버키의 체중따라 비명지르는 다 쓰러져가는 계단은 스티브를 피해 도망 간 루마니아 빌라보다 더 낡고 녹슬어있었다. 멈춰선 진한 갈색 나무 문은 요 며칠 스티브가 살고 있다던 플렛이였다. 버키는 노크를 해야하는 건지 아님 다 낡아 녹슨 둥근 문손잡이를 우그러트리고 저 안에 있는 스티브를 끌어내야 하는 건지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선택한 것은 정중한 노트였다. 똑똑 경쾌한 노크소리가 온 복도를 울리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감감무소식이였다. 이미 나가 사라졌나? 하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어느 새 쿵쿵 거리도록 문을 두들기는 자신의 오른손 때문에 옆에 살던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이봐! 여기에 몇가구가 사는데 그렇게 문을 두드리는 거야?!"
"....죄송합니다."
깡마르고 온몸에 문신을 한 남자의 눈은 퀭했다. 버키는 소리치는 그의 입에서 지독한 입내가 나고 그의 피부 언저리에 썩어들어 갈 정도로 벌건 두드러기를 발견하자 그가 약쟁이라는 것을 알았다. 씩씩거리던 남자는 마치 당장 사냥하기 전 긴장하는 풋볼처럼 앞에 선 버키를 보더니 흥분은 증발하고 살짝 겁먹는 눈빛으로 바뀌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은 짜증으로 일그러져있었다. '안에 안들어가고 뭐해 반즈!' 기다리다 지쳤는지 나타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집 양반 찾는거요?"
"네"
"당장 들어가 보쇼. 저 양반 어제 밤새도록 기침해서 한숨도 못 자가지고 아침에 찾아가 봤더니 얼굴이 시체처럼 질려있었다고요"
쾅하는 문소리와 함께 버키는 망설임 없이 장갑을 낀 왼손으로 종이 찢 듯 나무 문을 박살내버렸다. 딸꾹 다시 자기 집으로 들어가던 남자의 겁먹은 소리가 들렸지만 버키의 귓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왼쪽 이어폰에 들리는 반즈! 라는 고함소리가 언뜻 들린것 같았는데... 뇌가 느리게 반응했지만 버키의 마음은 스티브라는 불길에 한없이 흔들리고 타올랐다. 성큼성큼 들어가 보이는 작은 방은 옛날 깡마르고 가난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같아 울컥 무언가가 치고 올랐다. 하지만 감성적으로 빠질 수가 없었기에 버키는 작게 딸린 화장실부터 방과 부엌 선반 안쪽까지 스티브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있는것은 굴러다니는 옥수수캔 하나와 다먹어서 한두개 남은 홍차 티백과 두꺼운 스웨터 3벌과 겨울양복 바지만 나왔다. 가끔씩 그림을 그렸는지 얇은 공책안에는 변함없이 섬세한 그림들이 담겨있었다. 문제는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핏자국이 버키를 살떨리게 만들었다. 애 잃은 어미처럼 온 방안을 뒤 쑤시고 다 끄집어 내놓았지만 보이는 건 스티브의 흔적이지 스티브가 아니였다. 버키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언제 뺏는지 그의 이어폰이 덜렁덜렁 움직였고 이어폰 안은 소란스러웠다. 고장이라도 난건가 싶어 허탈감을 가지고 뒤돌아서자
그 앞에 다 망가진 나무 문에 기대 서있는 스티브 로저스가 있었다.
그의 모습은 윈터 솔져때 브레인워싱으로 뇌를 지져버리는 고문 속에서 흐릿하게 나마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로 변해 있었다. 섹시 심볼처럼 크고 근육질이였던 와일드한 캡틴 아메리카는 어디로 가고 한대 때리면 나무조각처럼 푹 꺾여버릴 것같이 깡마르고 빠진 살 때문에 보이는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졌던, 자신이 잘 아는 스티브 로저스였다. 놀란듯 멍한 푸른 벽안이 버키를 담았다. 그리곤 아킬레스 건을 찔린 사람처럼 눈썹을 찡그렸다.
"정말 너무들 하네."
"... ..."
"너까지 끌어들이다니...내가 뭐라고, 쿨럭"
"Punk!"
다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스티브가 기침을 토해냈다. 후두둑 그 마른 몸에서 어디서 그런 양의 피를 흘리는지 기침에 따라 피바다를 이루는 그 모습에 오히려 버키가 토해낸 것처럼 창백하게 질러버렸다. 당장 달려가 비틀대는 스티브를 감싸안았다. 잡혀오는 허리가 그때보다 더 가냘파서 그래서, 버키는 눈물이 찔끔 삐져 나왔다. 젖여오는 후드티에선 한번도 맡아본적 없는 스티브의 피향에 핑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의 피향은 쇳가루만 들어있는지 비리고 쓴 향을 풍겼다. 어딘가 발소리가 들리자 버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버키 만큼이나마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타샤와 샘이 반쯤 기절한 스티브를 부둥켜 안은 버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
스티브는 눈도 뜨지 못하고 내리 잠만 잤다. 다시 와칸다로 돌아온 두사람은 토니가 보여준 혈청의 수치를 보곤 아무 말 없었다. 혈청은 빠르게 스티브의 육체를 조각조각 가루가 되도록 박살 내고 있었다. 그 혈청을 맞서는 약을 토니와 와칸다 연구진들이 만들고 있었다고 했다. 아직 실험작인 상태로 스티브에게 주사를 놓는 와칸다 연구진의 모습을 바라보던 버키의 눈은 불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나무작대기 같은 팔을 잡는 연구진의 손은 왜 그렇게 큰 건지. 잡기만 해도 부러져서 그 파편들이 버키의 마음도 부러트릴 것 같았다. 혈청에 공격당하던 몸은 당장 슈퍼 솔져로 눌러 놓았던 병들까지 끌어다 모아 스티브를 공격했다. 갑자기 토해낸 피들과 천식으로 기관지는 숨을 쉬지 못했고 스티브는 깨어나기까지 일주일 내내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눈을 뜬 그 새파란 구슬이 버키는 몇번이나 이 밤을 넘기지 못할꺼라고 울던 스티브의 어머니 사라의 말에 미친듯이 뛰어와 보던 그때와 같았다. 그때 버키는 한 숨 돌리는 숨소리와 함께 스티브를 보며 이 한마디를 했었다. 지금처럼.
"어젯밤 잘 싸웠어 jerk"
그럼 스티브는 별거 아니였어 Punk 하고 힘없는 미소를 지어었다. 하지만 지금 약기운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는 스티브의 얼굴은 착잡함 만이 가득했다. 그의 갈라진 입술 위로 비참함이 튀어나왔다.
"왜...여기 있는거야 버키."
"네가 아프다는데 태평하니 잠이 오겠어?"
"그럼 이제 돌아가. 너도 힘든데 나 때문에 깨어있을 필요 없어"
스티브는 또 그 몸을 가지고 남을 걱정하고 있다. 버키는 옛날부터 스티브의 그런 성격이 너무 싫었다. 조금 이기적이고 조금 남탓하면 어디 덧날 것처럼 굴던 스티브. 100살이 되어도 그 성격은 변함이 없었기에 버키는 어금니를 살짝 물었다. 그때도 그런 스티브를 보며 화를 내던 자신이 생각났다.
"내가 말했지. 넌 조금 남탓하고 조금 이기적이게 굴라고"
"...내 마음대로 하면? 그러면 이거 다 떼줄거야?"
느리고 살짝 어눌한 스티브의 말이 향한 것은 그의 몸에 주입하고 있는 링겔과 산소호흡기였다. 버키가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것처럼 몸을 굳혔다. 그것봐 하는 파란 벽안이 버키를 가득 담았다.
"괜찮아 버키. 100살까지 살고...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소중한 너도 다시 구하고....난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내가 운이 좋았어."
"스팁."
"그러니깐 좀 쉬면 안될까? 난 네 말대로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어했던 것 같아. 변하고 싶어했어. 하지만 막상 건강한 육체를 가져봤자 나는 그냥 브루클린의 골골대는 스티브 로저스랑 다를 바가 없더라고. 그리고 그 스티브 로저스는 이제 쉬고 싶어"
"스티브!"
기겁하는 버키의 목소리와 함께 잡아드는 손길을 따라 스티브의 몸이 볼품없이 딸려왔다. 한 손 가득 들어도 들어올린 무게따위 없는 그 몸에 버키는 울컥 차오르는 울음을 버키는 삼켜야 했다.
"버텨. 너 잘하잖아. 끈질기고 고집 쎈 스티브 로저스. 그게 너잖아. 하이드라에서 70년동안 개새끼보다 못하게 구르던 나를 구해냈던 것처럼.버티란 말이야!"
"... ..."
"제발...나를 보고 버텨줘 스티비...나를 구해냈으면서 지 멋대로 가지 말란 말이야...망가진 나를 버리지 말라고"
악다구니 썼던 버키의 말이 한없이 약해져간다. 점점 풀러나는 멱살을 따라 스티브는 말없이 엉망으로 자라버린 버키의 브루넷 머리를 쓰담을 뿐이였다. 버키는 다시 돌아갈거냐는 트찰라의 말에 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답은 '아니오'라는 대답하나였다. 그는 스티브가 다 나을때까지 깨어있을거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트찰라는 책임지고 그대들을 구원하겠다고 말했다. 버키는 나중에 자기 머릿속 하이드라와 스티브의 혈청이 다 없어지면 와칸다의 국왕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혈청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예상대로 그 길은 가시밭 길이였다. 아니 가시밭 길이면 다행일 정도로 그 길은 고되고 강렬하게 들끓는 아픔 뿐이였다. 콜록! 콜록! 각혈한 지 얼마나 됐다고 스티브는 또 다시 새하얀 이불 보에 피를 토했다. 천식으로 헐떡거리며 토하는 스티브는 몇번이나 올라오는 피 때문에 고개를 숙였고 그런 버키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스티브의 몸을 받쳐주며 터진 폭포수 마냥 흐르는 피를 몇번이나 닦아줬다. 그 마른 몸에서 얼마나 더 많은 피를 쏟아야지 멈추는 걸까? 깨어나고 하루에 세네번 보는 각혈인데도 눈씨울이 뜨끈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멈추지 않던 피가 멈추자 의사들이 들이닥치며 또 이상한 약물을 놓고는 피를 뽑아갔다. 옆에 스티브의 피냄새로 흥건한 버키는 앙상한 팔둑 위로 혈관을 찌르는 그 주사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피를 토한 몸에 무엇을 더 뽑아가냐며 의사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아무것도 못한다. 아무것도. 호기롭게 그의 곁에 있겠다고 말했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몸에 돌아다니는 혈청들은 스티브를 무참히 짓밝고 찢어댄다. 약기운에 정신없이 잠든 스티브의 이마를 버키의 두툼한 손이 조심스럽게 쓰담았다. 식은땀으로 축축히 젓은 브론드 금발이 부드러웠다. 70년 전 그때처럼
눈을 뜨고 죽고 싶다는 스티브를 데리고 버키는 스티브와 함께 살던 집으로 발 걸음을 옮겼다. 피를 흘렸다던 집안에선 묘한 스티비의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확실한 건 스티브가 아프자 버키의 상태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세뇌코드와 함께 70년간 묵은 암덩이처럼 버키를 괴롭히는 하이드라의 고문과 트라우마는 버키의 안에서 버키의 뇌에서 끊임없이 회오리치며 버키를 파괴했다. 루마니아에서부터 몇번의 밤을 지새워도 버키는 잠들 수가 없었다. 잠들어버리면 냉동고에 들어가던 그 추위가 느껴져서 눈을 뜨면 삶이 아닌 죽음이 시작될 것같은 공포에 어둠 속에서 덜덜덜 몸을 떨 수 밖에 없었고 영양제가 든 링겔로 섭취하는 몸은 먹는다는 행위를 잘 몰랐다. 언제나 피해자들의 죄책감과 죽음을 원하는 우울증이 버키를 무겁고 조용히 지배했다면 지금은 아니였다. 버키를 지배하는 감정은 절박함 이였다. 다시 40년대로 돌아간 이 상황에 뇌는 하이드라든 문어대가리 든 하나도 받아드리지 않았다. 오직 스티브. 스티브 로저스로만 가득 차 올랐다. 먹는 둥 마는 둥 킷캣이나 초코쿠키 한봉만 사서 깨작되던 과거를 비웃기라도 하듯 버키는 환자에게 좋다는 영양스프 재료를 칼같은 시선으로 보고 또 보고 만지며 신중히 골라 차트에 넣었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약 때문에 잠든 스티브가 깰까봐 소리없이 절도있는 행동으로 재료들을 다듬었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70년전에 스티브가 아프면 해줬던 미음을 완벽하게 재연했다. 망가진 뇌는 스티브라는 존재에 다시 버키 반즈를 기억할려고 애썼따.
"스팁ㅡ스티비 일어나"
장갑을 꼈다해도 차가운 왼손이 스티브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뜨겁게 열이 오른 스티브의 이마를 한번 쓸어보곤 배에 손을 올려 살짝 흔들었다. 간신히 고른 숨을 쉬며 잠들어있던 스티브의 긴 속눈썹이 달린 눈꺼풀이 팔랑팔랑 움직였다. 들어올린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벽안은 병마와 싸운 피로감을 덕지덕지 달고 있었다. 부축하는 버키의 손길에 다시 눈을 뜬 현실이 끔찍한 듯 눈썹을 깊게 찌푸리고 앉아있었다. 버키는 그런 스티브의 눈치를 보며 자신이 어떻게 웃는지 기억도 안나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Hey 이제 일어나시죠 영웅씨? 잠자는 공주님 놀이는 밥먹고 하자"
"... ...먹기싫어"
어린 아이 투정이 들린다. 아 저 말투. 문득 문득 아팠던 스티브가 지었던 말투였다. 이런 걸로 그리움을 느끼기 싫은데... 버키는 예전처럼 '쓰읍 엄마 말 들어야지 아들-' 하고 장난치던 그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쓴 미소만 달게 내뱉을 뿐이였다. 그건 스티브도 마찬가지 였는지 모락 모락 열기를 피어오르는 묽은 죽을 몇번 휘적거렸다.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모든게 액체화된 듯 한 죽을 한숟갈 뜨더니 입에 넣었다. 항상 아플때면 일어난 까끌한 입술각질이 다 먹지 못하고 삐져나온 죽이 방울방울 묻었다. 그 물방울이 시선에 닿자마자 버키의 왼손이 위잉 하는 소리와 움찔거리는 오른손이 느껴졌다. 그때처럼, 70년 전 가슴에 반짝거리는 훈장따위 달지 않던, 삐그덕 거리는 나무장판과 비가 내리면 눅눅한 공팡이 냄새가 나던 낡은 원룸에 살던 뭘해도 반짝거리던 이제 막 성인의 육신으로 인정받았던 어린아이였을때 처럼 손이 나갈 뻔했다. 항상 뭘 그렇게 흘리던 스티브의 모습을 항상 웃으며 닦아주던 평범했던 자신이 였다. 가슴이 누군가가 꽈악 잡는 느낌. 그리곤 네가 그때와 같냐는 비웃는 목소리. 이 것들이 무엇인지 버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70년이 지났어도 캡틴 아메리카였어도 그 본질은 변함 없이 예민하고 고집스레 아픔을 참아왔던 스티브 로저스라는 걸 보여주는 브루클린 꼬맹이와 다르게 자신은 얼마나 많은 피로 얼룩지다 못해 불행의 피라냐를 몰고다니는 것처럼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70년을 사용했어도 무시무시한 살인기기를 달고 있는 몸뚱이로 스티비를 돌보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였다. 그렇지만...
"콜록! 콜록!"
세숟갈 먹었을 뿐인데 미미하게 찌푸리던 눈썹을 팍 구기며 발작처럼 기침을 토해냈다. 화들짝 놀란 버키의 손은 어느 새 물잔을 들고 있었다. 스티브의 어깨를 감싸는 오른팔에는 미미한 열로 높은 체온이 전해진다. 입가를 꾹 누르며 천천히 기울리는 물잔을 진이 빠진 스티브가 거부감도 없이 버석한 입술사이를 벌렸다. 100년 가까이 흐른 세월과 그 대부분을 하이드라 고문이란 커다란 흉터로 얼룩덜룩한 몸뚱이는 다행스럽게도 얼마만큼 기울기로 스티브에게 물을 먹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꼴깍꼴깍 목울대를 넘기는 스티브는 이제 식어버린 죽보다 물을 더 잘먹었다. 푸하... 작은 숨소리가 병아리의 날개짓처럼 작게 터져나온다.
"이제 됐어."
"그래도 조금만 더 먹자. 응? 기침도 기운이 있어야하지"
"됐다니깐...잘래"
힘없는 목소리와 똑같은 앙상한 팔이 버키의 어깨를 밀었다. 그때 윈터 솔져로 살아갔을때 느꼈던 묵직함은 눈씻고도 찾을 수 없이 어깨 위로 먼지가 내려 앉은 것 같아 버키는 차오를 것 같은 무언가를 삼키며 아무렇지 않게 쟁반을 침대 선반 위로 올렸다. 부스럭, 끼익끼익 움직이는 왼손을 따라 약봉지를 꺼내 내용물을 쏟았다. 알록달록한 알약들이 왜이렇게 많은지 자신이 봐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당사자는 오랜만에 보기 싫을 정도로 미간이 패이도록 찌푸리고 있다.
"음...일단 제일 맛있는 것 부터 먹자"
"먹기 싫어"
"스팁"
"그냥 나 좀 편하게 하면 안돼? 버키?"
타박도 원망도 체념도 아무것도 담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가 버키 곁을 떠오른다. 언제 또 이렇게 살이 내렸는지 움푹 들어간 눈매 속 맑은 벽안이 자신의 말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는 버키를 가득 담고 있었다. 뭐든 걸 포기한 그 눈이 가슴 속 깊숙히 숨겨두었던 버키 반즈의 마음을 난도질 하며 넝마짝으로 만들었다. 울컥울컥 마음 속에서 퍼지는 핏덩이를 삼키며 버키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스티브 코 앞까지 약덩어리들을 내밀었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과 함께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개씩 목구멍으로 넘겼다. 꼴깍거리며 넘겨지는 약들이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스티브의 목을 더욱 안쓰럽게 만드는 것 같아서 더욱 처다보지 못했다. 시위하듯 다 먹은 컵을 버키의 손바닥에 탈탈 털더니 그것도 힘이 드는지 떨어트리듯 컵을 놓쳐버렸다. 사과도 대꾸도 아무것도 없이 스티브는 꾸불거리며 두툼한 이불 무덤 안으로 몸을 뉘었다. 뒤돈 그 뒷모습은 흐릿한 과거때 보다 더 앙상해 보였다. 대체 처방했던 모든 약들이 지금 스티브에게 얼마나 영향이 있는 것이긴 할까? 내일 정기검진 하는 날에 한번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하며 버키는 스티브가 편안하게 숨을 쉬는지 지켜보다 조용히 방밖으로 나갔다.
**
"혈청 수치가 더 높아졌어"
배너 박사의 한 마디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박힌 시선을 제거하지 못하고 이제는 익숙한 인공지능 스크린을 큰 눈을 꿈벅이며 바라봤다. 붉은 색, 붉은 막대 그래프가 흉측하게 올라가 있다.
"이봐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네가 우리에게 뭐라고 그랬더라? 저 혈청 수치를 반토막 낸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어?"
"말도 안돼..."
"일단 지금이라도 남아있는 억제제를 먹이는 게, 반즈!"
한껏 비아냥 거리는 토니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한마디 남기는 트찰라를 보기좋게 밀어버렸다. 스티브의 약들이 담긴 가방을 짊어지고 달려가는 그 모습을 보며 헉 누군가가 숨을 삼키는 소리를 냈지만 그의 귓가엔 닿지 못했다. 눈 앞이 처음 스티브가 그린란드로 자살쇼를 벌였다고 들었던 그때처럼 붉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찌잉찌잉 울리는 경고음을 무시하고 스티브가 기다리는 병실 문을 보기 좋게 강철팔이 박살내버렸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음에도 스티브의 반응이 느렸다. 당장 톡하고 부러질 것 같은 그 모습이 힘이 잔뜩 들어간 두 손이 가방을 들자 가방은 모든 내장을 토해 내 듯 모든 걸 쏟았다. 촤르륵 쏟아지는 소음들과 투둑하고 떨어지는 물건들이 피를 토하듯 온 방안을 어지럽히더니 결국 데구르르 발밑으로 굴러오는 약통하나를 집어 들어었다.
"먹어"
"... ..."
"먹으라고 했어"
"...됐,"
체 말이 끝나기 전에 스티브의 무딘 혀끝엔 차갑고 딱딱한 강철맛이 느껴진다. 피라도 토한 듯 온 입안이 철분으로 이질적인 맛이 전해진다. 아. 목구멍 가득 쑤셔지는 약의 느낌과 본능적으로 눈물이 고이는 시야 속 엉망으로 일그러진 버키의 얼굴. 어릴 적 된통 아프면서도 괜히 고집 부렸을 때도 이랬던게 기억이 난다. 그때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타인의 손길에 잔뜩 약을 삼켰을 텐데 지금의 스티브는 꾸역꾸역 넘기 그 손가락들을 억지로라도 물고 목구멍을 닫을려고 했다. 먹어, 먹으라고 씨발! 울음이 가득 든 익숙한 목소리가 히스테릭한 비명을 곁들인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았는지 스티브의 입안을 벌리고 억지로 먹이는 버키의 양손을 끊어버릴 것처럼 조개피마냥 이를 꽉 물고 놔주지 않았다. 줄줄 흐르는 버키의 피가 강철 손과 함께 무딘 콧 속까지 철분향으로 가득하다. 스티브의 머릿속은 약이 아님 질식으로 노래지는 것을 느끼며 체념한 듯 눈을 느리게 감을 려고 할때 갑자기 숨통이 트였다. 쿨럭, 쿨럭 컥 기침이 터지자 입안 가득 고인 버키의 피들이 엉망진창이 된 병실가득 튀어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무작정 그런다고 캡틴이 먹겠어?"
"아까 당신들이 사는 집을 확인 하니깐 저 양반 당신 몰래 먹었던 약들 모두 다 토할려고 화장실에서 죽치던 인간이야!"
"왜,대체 왜, 왜애!!!"
아아아아 퍼지는 병실은 이젠 천식과 자신의 피를 토하는 저 브루클린 꼬맹이의 모든 것 만큼 비명횡사 하는 영혼들의 소리처럼 울음을 내질렀다. 당장 누군가를 죽일 것 처럼 무시무시하게 달려든 윈터 솔져는 이젠 버키 반즈가 되어 자신을 말릴려고 온 동료들의 팔을 붙잡고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전부를 향한 원망과 절망을 토했다. 그 내용이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워지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모두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들이였다. 왜, 왜 하필 자의든 타의든 결과는 하이드라 밑에서 24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윈터 솔져가 아닌 한 평생 정의를 위해 살아가던 저 브루클린 풋내기에게 죽음의 시한폭탄이 터져버린 건지 그러면서도 또 다시 살려고 버둥 거리지 않고 죽음과 함께 떠날려는 저 꼬맹이를 향한 원망의 깊이를 끊임없이 되새겨 준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이드라의 사신도 함께 목숨을 맡기고 전장을 뛰어다니던 동료들도 그 풋내기를 놓아 줄 수 없었다. 그의 생명이 붕붕 뛰어오르는 풍선이였음 모두 다 날아가지 않도록 두 손가득 모아 달고 다녔을, 소중하디 소중한 캡틴.
"쿨럭...! 하아...미안하지만 난 이제 캡틴이 아니야"
그런 모두를 비웃기라도 하듯 익숙하게 피를 다 토한 스티브의 단정한 목소리가 약올리기 라도 하듯 버키 반즈의 울음을 찢고 들어온다. 큭, 흑,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자신을 바라보는 버키와 언제부터 눈물이 많아진 어린애가 되버린 건지 전장에선 본적 없는 붉어진 눈시울로 슬픈 표정을 짓는 동료들까지 모두 다 스티브를 향해 시선이 쏟아졌다. 그제야... 스티브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는....난....스티브야"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아니.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가 아닌 브루클린 스티브 로저스. 난 그 스티브야."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입을 뗀 냐타샤의 말을 거절하듯 다정한 혹은 꺼져가는 촛불같은 목소리가 방안 가득 밝힌다.
"마지막은 브루클린 스티브 로저스로 있고 싶어...부탁이야"
"그래도 난 포기 안해"
다들 목구멍이란 기관이 퇴화한 신 인류라도 되는 듯 아무런 말도 벙긋 못하는 이 묵직한 공기를 단호한 목소리가 썩둑 자르고 들어온다. 언제 애끓던 울음소리를 냈냐는 듯 샘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버키 반즈는 걸음걸이 만큼은 비실이 스티비를 든든하게 지켜두던 그 걸음걸이로 걸어 왔다. 브루클린 꼬맹이 때 처럼 다시 고개를 까마득하게 들어야지 보이는 버키의 얼굴은 두 눈가가 짖무르도록 붉게 변하고 눈물자국도 다 지워지지 않았는데도 짓고 있는 표정은 말도 안돼는 고집을 단호하게 막던 형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브루클린 버키 반즈이기 때문에 널 살릴거야"
"...버키"
"그건 널 만났을 때부터 평생을 해왔던 일이야. 브루클린 꼬맹이가 되고 싶다 했지? 잘됐네 그 꼬맹이가 내 곁에 있으면 난 언제나 브루클린 버키 반즈가 되버리는 거 알고 있지?"
"고집부리지마"
"너야말로 고집부리지 말고 약 먹어. 앞으로 너 화장실 가는 것도 나한테 엎혀 가야할거야. 그렇게 알아 kid"
**
도전 아닌 도전장을 내민 버키는 당장 두 천재에게 붙잡혀 한시간 내내 주사 놓는 방법을 들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았는지 팔다리 하나 성치 못한 몸을 이끌고 모든 약을 화장실에서 토해낸 결과는 숙제 못한 아이에게 더 많은 숙제와 복습을 주는 것처럼 더더욱 독한 약물과 몇가지 약들이 추가 됐다. 고집부리는 그 바보 때문에 자신 또한 바보가 된 듯 떵떵거린 버키지만 반은 못알아 먹는 약 성분을 들을 수록 눈썹이 절로 찌푸러 졌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 액체 가득 제 2의 백혈구 같은 세포들이 혈청과 접촉하면 같이 동귀어진 하게 된다고 한다. 이 약물 속 세포들이 변종 된 것 하나 없이 건강하다면 스티브 몸 속에 있는 혈청들을 단기간에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스타크가 자신있게 이야기 해왔지만 이미 버키가 생각하는 미래는 계속 안좋은 쪽으로 쏠려나갈 뿐이였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약을 가지고 아늑하다면 아늑하지만 한편으론 그늘지고 칙칙한 브루클린의 작은 플랫으로 돌아갔다.
"스티브 당장 문 열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자 대놓고 스티브는 모든 세상을 외면하듯 방문을 잠갔다. 이제는 한 시간에 한번씩 놔야하는 주사를 들고 문을 두들기는 왼손은 지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치만 시간이 흐를 수록 그의 마음은 쿵쿵 울리는 방문이 되어 자신의 주먹질로 시퍼렇게 멍들어 간다. 다시 이를 지긋히 물던 버키는 결국 하기 싫다는 아랫 입술을 꾹 물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옷장 위를 더듬었다. 오른 손에 전해지는 차가운 표면이 걸린다. 성큼성큼 걸어가 불안감과 서운함으로 엉망진창인 문이 쉽게 달칵하고 열린다.
"스티비"
"... ..."
"자는 거야?"
"... ..."
"그러지 말고 나 한번 보면 안돼? 나 앞으로 안볼거야?"
세뇌코드로 얼러지기 전까지 일주일간의 유혜기간이 있었다. 그 때 두 늙은 참전용사에게 오랜간만의 평화가 찾아왔었다. 그때 왜이렇게 하고 싶어지는 것들이 많았는지... 자신이 저지르는 무모하고도 대담한 부탁에 당황한 빛을 보이는 스티브에게 쐐기를 박듯 많이 썼던 말투였다. 동글동글 굴러가듯 부드럽고 여상스런 말투. 역시 지금도 먹히는지 머리꼭지까지 올라간 두터운 이불이 한번 들썩거렸다. 왠지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앙큼한 행동에 비실비실 삐져나오는 입꼬리를 누르며 이번엔 자신의 강철 손이 천천히 이불을 내렸다. 창백한 스티브의 뒷태가 눈앞에 펼쳐진다. 옛날에도 많이 보던 넉넉한 옷자락과 야윈 등짝. 70년 전 그때처럼 덩치 생각 못하고 저 등짝에 매달려 웃고 싶었지만 70년 간의 간극은 한없이 부서질까 손 하나 대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자자- 당장 일어나서 약먹고 그림이든 책을 읽든 하자"
"...그냥 냅두면 안돼?"
"스티브처럼 대해달라며? 너 약 먹고 난 다음엔 항상 나랑 책 읽었잖아?"
"....기억이 나?"
오랜만에 마주 본 그 맑은 벽안이 꽝꽝 얼러져 버리기 전에 봤던 캡틴 아메리카를 떠올리게 했다. 머릿속은 자기 멋대로 튀어나온 문장에 당황해하면서 얼굴은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로 답했다. 어색하게 웃는 친구를 발견하지 못하곤 넋이 나간거처럼 몇번이나 기억하고 있구나 하고 다 갈라진 입술을 오물거렸다. 신경은 온통 스티브에게 쏠려있으면서 겉으로는 아무 렇지 않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깡총거리는 넉넉한 소매가 팔뚝 끝까지 접어도 헐렁거린다. 팔꿈치 가까이 묶인 고무 줄인데도 혈관하나 찾기가 힘이 들었다. 이럴때 아무런 딸림 없이 프로패셔설하게 주사를 놓는 왼손을 좋아해야하는지 울어야하는지 알기 힘든 감정들이 차올랐다.
"자 끝. 일단 배부터 채우자 오랜만에 비트스프 했어"
"...그거 진짜 자주 먹었지"
"그래. 우리 스티비가 춥다고 할때마다 끓어줬지. 특히 너네 엄마가 스프 달인이였잖아."
"맞아. 비트 말고도 옥수수 감자 당근 참 맛없는 재료로 맛있게 만드셨지"
"그것 말고도 퓌레나 크림도 잘 만드셨고"
"그건 프레드 아줌마가 더 잘 만들었어. 우리엄만 뭐든 소화 잘되게 만들어서 큰일이였잖아 예전에 미트 스파게티 만들었다고 내놓은게 그냥 미트죽 이였고"
"그래...기억난다. 그래도 맛있더라."
"... 정말 모두 다 기억나는 구나"
다행이다... 귓가에 스쳐 지나가는 그 목소리가 왜이렇게 안도의 빛을 띄우는지 자기 앞에 있는 저 꼬맹이에게 뭍고 싶었다. 일말의 불안감이 등을 타고 뒷목까지 스믈스믈 올라와서 목밖으로 소리치고 싶었다. 모든 걸 기억하니 나를 두고 도망 갈거냐고 당장 죽음을 따라 갈 거냐고 해소되지 않는 불안감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 그 불안감을 안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자신의 꼬맹이의 머리를 헝크리며 일어나는 것이였다. 굳은 살과 피딱지가 덕지덕지 박혀 더러운 오른 손이였지만 손가락 사이사이 빠져나가는 금실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눈물겨운 노력이 매실을 맺친 듯 버키의 입에서 아련한 브루클린 과거가 튀어나올때마다 스티브는 홀린듯 버키가 주는 약을 받아 먹었다. 그 모습때문인지 점점더 과거에 대한 집착이 절로 높아지고 진뜩해져간다. 가끔 약에 취해 하나하나 과거를 꺼내는 스티브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스티브를 데리고 점진을 하는 날에는 미친듯이 스티브가 말한 장소로 달려가 모든 걸 머릿속에 넣을려고 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통구이가 된 뇌가 쪼글쪼글 화상이 남긴 추억들이 회상할 수 있길 바라왔다. 가끔은 벼락이라도 치듯 모든 기억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고 아니면 꽉막힌 하수구 마냥 하나도 깨질 듯한 두통만 올때도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리통을 두개로 쪼개버리는 아픔이였지만 항상 약에 취해 몽롱한 그 벽안이 또랑또랑한 눈을 빛내는 모습은 참을 수 없는 중독을 만들었다.
"약은 챙겼어? 티켓은?"
"다 챙겼어. 죽겠다 죽겠다 해놓고는 클림프 그림은 보고싶은가 보내"
"볼 틈이 있어야지 말이야"
"그래그래 알았으니깐 고개 숙이세요"
목덜미를 감싸는 목도리가 가을철 앙상한 나무가지처럼 가냘픈 스티브의 목을 감싸준다. 가까스로 눈만 빼곰 나온 그 얼굴이 왜이렇게 웃기고 사랑스러운지 결국 그의 입에선 웃음소리가 터졌고 그 소리에 눈썹사이가 깊어졌다. 그 꼬맹이가 어른처럼 굴고 싶을때마다 짓던 표정이다. 너무나 친숙하고 그리웠던 표정에 버릇처럼 손이 나갈뻔 했다. 끼이익 움직이던 왼손에선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깊이 빠져 있던 과거들이 물거품처럼 톡톡톡 터지며 다시 현실에 끌려들어온다. 어색해진 공기를 뒤로하고 버키는 휠체어를 설치했다. 이제는 자신의 다리로 일어설 수 없는 스티브를 위한 새로운 다리였다. 혈청 지수가 떨어졌지만 폐허가 된 스티브의 몸은 망가질 뿐이였다. 일어설 수 없다는 그 말에 새로 만든 아머가 있는데 한번 타 볼 생각 없냐는 스타크의 장난어린 걱정에 스티브는 그저 휠체어면 충분하다고 미소지었다.
"자 꽉잡아"
하나 둘 셋 구호따위 없이 안고 들고 뛰어도 되었지만 오직 스티브가 놀라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튀어나온 것이였다. 70년을 어떻게 하이드라 밑에서 윈터 솔져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 새삼스레 자신은 휠체어에 앉아 담요로 둘둘 말린 금발머리가 이세상의 전부였다. 밖으로 나가는 바람이 스티브를 공격할까 버키의 손놀림은 빨라진다. 운전 면허도 없으면서 익숙하게 옆자리에 스티브를 태우고 트렁크에 휠체어를 접어 넣는다. 최대한 어떤 떨림도 없이 시동을 걸고 핸들을 돌렸다. 색색 갑갑할 정도로 찬 목도리와 안전밸트 때문인지 낮은 스티브의 숨소리가 예민한 버키의 귀를 간지럽힌다. 마치 살아있다고 아우성 치는 것 같아 듣기 좋았다.
전시장은 조용했고 부드러운 난색 전구로 고개가 넘어가도록 커다란 클림프 그림들을 보여줬다. 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그 그림들이 눈을 멀게 만들었다. 천천히. 천천히 가자. 들려오는 스티브의 가냘픈 목소리따라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생명력이 넘치는 화려한 금빛들이 눈이 먼 장님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스티브에게 생명을 부여하길 바라왔다.
"목말라."
"뭐 먹고 싶어?"
"커피"
처음으로 무언가 먹고 싶다는 말에 버키의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마주 본 벽안은 피곤한지 눈이 가물가물하다. 망설임 없이 단번에 휠체어를 밀고 전시장 1층에 딸린 카페로 들어갔다. 잠깐만 기다려. 물가에 애라도 내어 놓은 것처럼 안절부절하는 너른 등을 스티브의 앙상한 팔이 밀었다. 계속 불안한 듯 힐끔 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저 바보에게 스티브가 손을 흔들었다.
"주문하시겠어요?"
"따뜻한 라떼 두잔이요"
"테이크 아웃 하시겠어요?"
"아니요"
전전긍긍하는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심드렁한 알바생의 목소리가 들리며 계산해온다. 버키는 그녀가 건내는 대기카드와 체크카드를 냉큼 받고 당장 자리로 돌아갔지만 거기엔
스티브가 없었다.
**
매서운 바람때문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높아진 하늘위로 떠오른 구름들이 저렇게 포근해 보이는데 공기는 참으로 칼같다. 머리 위로 뭐가 떨어지자 절로 고개가 흔들린다. 손바닥 위로 다 마른 낙엽이 떨어진다. 그것을 천천히 바라보던 그 시선에 누군가가 달려오는게 보였다. 커다란 덩치에 긴 브루넷을 치렁치렁하게 기른 남자. 언뜻 누군가를 해칠 것 같아 스티브는 절로 몸을 움직일려고 했지만 앙상한 다리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자리에서 엉덩방아만 찧는다.
"스티브!!!"
"... ..."
"대체 어딜, 이 추운곳을 왜 나와있어?!"
"... ..."
"내가 얼마나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몸도 성치 않으면서"
와락 안아주는 그 몸이 뜨겁다. 귓가에 스치는 그 목소리가 너무나 축축하다. 자신과 맞추는 맑은 청회색이 물이라도 담긴듯 물빛처럼 반짝거렸다. 아. 꿀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런 말을 못하던 그 입에서 당황의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나 큰일났구나... 다짐하고 받아드린 머리와 다르게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버키..."
"그래. 입이 있음 이야기 좀"
"나, 왜 나와있는지 기억이 안나."
틈 사이로 스치는 공기만틈 묵직한 침묵이 퍼진다. 당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어 유일하게 자신의 모든 걸 받아드리는 그와 시선을 맞춘다. 그도 당황과 충격으로 얼룩 덜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