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는 심장부근에 손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연약한 몸은 작은 충격에서 다친 새가슴 마냥 미친듯이 심장이 뛰었다. 반응이라면 심장 부근을 잡고 있는 것만 하고 있기만 하자 생글생글 웃으며 튀어 나온 그는 당장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기다렸는지 가까워지자 전해지는 코롱향이 바람냄새와 섞여 스티브에게 전해진다. 어디 아파? 병원에서 무슨 문제 있대? 상냥한 말과 이 한 겨울 바깥에 있어도 뜨거운 큰 손이 스티브의 가늘디 가는 어깨를 만지며 마지막은 목덜미를 꾸욱 잡았다. 온기 때문인지 아님 여태까지 앓아 온 감정 때문인지 목덜미 부분부터 시작해 심장 끝까지 불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별거 없었어...근데 무슨 일이야? 메이린이랑 데이트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일이 있어야 우리 스티비랑 만났나? 메이린 가족들 중 고모가 쓰러지셨다고 해서 파토났지 뭐. 그리고 우리 스티비 폐렴도 나 나았으니 축하파티 해줄려고 왔지" "...나아봤자 매년 걸리는건데." "야 그래도 저번보단 이틀이나 빨리 나았어? 그런 말 하지마. 건강해지고 있다고 넌."
웃으면서 말하는 그가 이제는 익숙하게 스티브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흥얼흥얼 파티장에서 유행하는 콧노래를 부르며 스티브가 항상 두던 벽돌을 발로 치우며 지 집처럼 문을 열고 들어간다. 비상열쇠가 십몇년을 알 던 친구 손에는 그 친구의 소유물 인냥 자연스레 열리고 들어가게 한다.
"너 또 열쇠 잃어버리지마." "알았어~ 잃어버려도 내가 사오잖아?" "사오는 것도 사오는 거지만 누가 비상열쇠라고 생각하겠어? 하도 들었다 놨다 해서 벽돌 주변엔 먼지도 안 쌓였다고" "그러니깐! 나랑 같이 살자고~ 같이 살면 비상열쇠는 자기 일을 할 수 있다니깐"
익숙하게 들어와 어릴 적부터 써온 손 떼 가득한 식탁 의자 위로 밤색 외투와 정장외투까지 벗어 걸어간다. 자 외투주렴 아들아. 익숙한 장난꾸러기 미소가 아직도 뚱해 보이는 집주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결국 피식 바람 빠지는 미소와 함께 낡았지만 이 집에서 제일 두꺼운 베이지색 모직 코트를 넘겨 주었다. 넘겨주며 스쳐지나간 손가락의 온기에 또 심장이 빠르게 타들어가는 듯 뜨거웠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증상이 스티브를 괴롭혔다. 스스럼 없이 터치해오는 손길 하나에 심장이 뛰고 웃으면 생기는 눈가 주름을 보이며 휘어지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는 청회색이 자신에게 향하면 목에서 부터 정수리까지 열이 치솟는 느낌이 들며 자신에게 향하지 않았으면 싶으면서 떨어지면 아쉬운 마음에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태어날 때부터 오랜 투병 생활을 해온 스티브는 이 증상이 낯설지만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책 문구에 쓰여 지고 노랫말에도 들리던 증상이 였기 때문이였다. 아프든 건강하든 늙든 젊든 겪은 열병. 오직 노란색과 초록색 푸른 색밖에 보이지 않는 이 세계도 그의 웃음 한번에 무지개 빛깔로 보이고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달콤한 사탕 맛이 느껴졌는지 알게되면서 또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가면 숨도 못 쉬어 질 정도로 심장을 쥐여짜이는 이 증상.
언제인지 어느 때 걸린 건지 스티브는 그렇게 많은 병을 가지고 있으면서 태초에 가지고 있는 병마들보다 더 지독한 병마를 앓고 있다. 그 병마의 이름은 '버키 반즈를 향한 짝사랑' 이라고 스스로가 정의를 내렸다.
언제부터 '짝사랑'이란 병에 걸리게 된 걸까?
턱을 괴고 어디서 구했는지 미트볼 통조림을 털어 스파게티와 집에서 프레드 아줌마 몰래 가져온 바게트 하나와 감자 두덩이를 소금 간 후 으깨 럼주와 함께 마시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술이 들어가서 인지 아님 2주를 폐렴에 앓아 만나지도 못했던 스티브를 만나 즐거운 건지 버키는 먹는 내내 2주 동안 있던 이야기를 술술 말하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스티브의 몸은 병마를 달고 다니는 만큼 위도 작고 예민해서 인지 미트볼 한두개와 절반의 스파게티로 식사가 끝난 상태였다. 긴 손가락이 유려하게 포크를 돌리는 모습까지 시선에 들어오자 그 손까지 멋지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머리가 참 한심했다. 이미 성장기도 지난 어엿한 성인인데도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먹고 또 먹는 버키를 위해 반을 남긴 스파게티를 말없이 버키 앞으로 가까이 둔다.
"스티비..." "왜?" "더 먹지...나 안 먹어도 괜찮아. 아니 3일을 굶어도 끄덕없어. 그러니깐 우리 스티비 다 먹어 감자도 다 먹고 바게트도 다먹고"
붉어진 얼굴로 곧장 돌아가신 어머니와 똑같은 표정을 짓던 버키는 조금씩 남은 으깬 감자와 바게트를 스티브 접시에 올리며 되려 밀어내려고 한다. 스티브는 얼마 전까지 그 말을 듣고 묵묵히 버키가 준 음식들을 먹다 끝내 크게 탈이 나자 울며불며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모르던 버키의 얼굴이 떠올라 입을 꾹 다물 뿐이였다. 그 사건을 잊어버렸는지 결국 벌떡 일어난 버키가 곧장 스티브의 옆에 앉자 울렁거리는 술냄새와 기분좋은 코롱향이 섞여 들어온다. 축농증으로 코감기와 숨쉬기가 힘든 코는 이상하게도 버키의 체향과 코롱향은 잘도 잡아 냈다.
"응? 나 걱정말고 우리 스티비 다 먹자. 자 아빠가 먹여줄게" "네가 왜 우리 아빠야. 그리고...한달 전에 먹다 크게 탈났던 거 기억 안나?" "그랬나...? 맞다 그랬지~ 그때 우리 스티비 보름내내 죽만 먹었지~ 나 때문에 빌어먹을 식빵쪼가리 먹다가 크게 아팠었지...병신같이 그거 하나 못알아차리고 계속 처 먹인 나 때문에 크게," "아니라니깐! 그냥 평소처럼 내 몸이 병신이라서 그래! 자꾸 그런 못된 말 할래 버키?!"
술만 들어가면 하나씩 자기 잘못을 가지고 상처를 입히는 버키의 술버릇에 단호한 말이 절로 튀어 나왔다. 막지 않음 알고 지낸 추억 들 중 스티브를 잘 몰라 크게 다쳐 병원에 꼼짝 없이 누워 있을때 부터 작년에 생일 선물로 버키가 사준 스케치북에 손가락을 베인 것까지 자기 사소한 아픔마저 끌어와 주절 댔기 때문이였다. 그 순간이 스티브에겐 특별한 시간이였다. 버키 반즈랑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된 것 같은 추잡한 기쁨을 은밀하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입은 버키를 말리면서도 마음은 기쁨으로 마구잡이 뛰노는 조랑말이 된 듯 가슴이 뛰었다.
마음이 약에 취한 말새끼가 뛰어다는 일은 참 많았다. 옛날 스티브만 보면 집요하게 따라와 모욕감을 주던 또래 양아치 한명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스티브에겐 참 불쌍한 사람이였다. 그가 스티브를 보며 금붕어 똥처럼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데리고 조롱과 창피함을 주기 위해 입을 요란하게 움직이지만 스티브 옆에 있는 버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스티브는 알아차렸다. 그 사람의 목적은 자신이 아닌 옆에 있는 버키라는 것을, 그때 스티브는 그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자신과 같은 '버키를 향한 짝사랑'이란 병마에 걸러 있다는 것을 만약 그가 여자였음 그 병을 치료할 기회라도 있었겠지만 그는 버키와 엇비슷한 등치를 가진 건장한 남자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는 스티브와 버키가 함께 있는 걸 못견뎌 했다.
『병신 로저스양은 어딜 급히 가시나?』
그때도 어머니의 유독하단 소리에 뛰는 것도 잘 못하는 몸으로 정신없이 뛰던 스티브를 붙잡던 목소리가 들렸다. 재수가 없게도 그 양아치 한명에게 걸린 것이였다. 그들은 항상 스티브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억지로 끄집어 알고 싶지 않은 현실을 들먹였다.
『그 몸에 바지는 불편하지 않냐? 우리 할머니가 썼던 치마 있는데 그거라도 줄까? 어? 스티븐양!』
처음엔 듣고는 울컥 올라오는 열등감에 몸서리 쳤던 스티브 였지만 항상 똑같은 레파토리에 이제는 귀찮는 잔소리마냥 들릴 뿐이였고 평소같음 15분 만 참으면 다신 내 눈앞에 띄면 고추 자를거라는 소리와 함께 양아치는 발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오늘 스티브는 자신의 자존심을 더럽히고 열등감을 괴롭히는 양아치를 상대할 틈이 없었기에 그말을 가만히 들을 수 가 없었다.
『너. 네가 브루클린에 있으면 죽여,야!』 『... ...미안하지만 나 놀리는 것 좀 적당히 하지? 그런다고 버키가 니들이랑 놀아 줄 것 같아? 유치한 짓 좀 그만해라』
눈 앞이 번쩍해졌고 정신없이 뛰던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자신을 놀리던 인물 중 말로만 지랄하던 그 였지만 사실을 말하는 스티브의 목소리는 자신에게 아팠었는지 거침없는 주먹질이 떨어진 것이였다. 볼인지 머리인지 달궈진 쇠고랑에 맞은 것처럼 뜨겁다. 뭐라는 고함 소리와 함께 앙상하게 마른 등 위로 체중을 실은 발길질을 버텨내지 못하고 고꾸라지기 일수였지만 별이 떨어지는 엉망인 머리 속은 병실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별들과 함께 뒤엉켰다.
『저리 안 꺼져 개자식아!』
흐릿한 정신 속에서 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에 스티브는 자기가 갈때까지 간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뚝 하고 끊긴 발길질과 욕설 그리고 단단하게 자신의 어깨와 옆구리를 받치고 일으키는 손길에서,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약간의 땀내와 향기로운 코롱향이 섞인 체향이 누구 것인지 깨닫자 심장 어딘가에서 망아지가 날뛰었다.
『우리 스티비 건들면 죽여버린다고 했지 씨발롬아...!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냐? 어?』 『버,버키?』 『이리 와, 이리 오라고 씨발!』 『그만해! 그러다 죽겠어!』
더듬 거리는 벽을 집고 어지러운 시야 끝으로 보이는 건 언제 자신을 두들겨 때렸냐는 듯 온 얼굴이 터져 나 뒹구는 남자와 그 위에서 씩씩 거리며 그렇게 뜨겁고 따스했던 손이 돌이라도 된 듯 묵직한 주먹을 날리는 버키의 모습이였다. 스티브를 구해주는 버키를 몇번 보기는 했지만 저렇게 사람을 죽일 때까지 때리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에 새삼스레 버키가 자신에게 엄청 물러터진 사람이란 걸 되새기며 당장 분노인지 힘 때문인지 부들부들 떠는 버키의 팔뚝을 잡고 매달렸다. 새액새액 피범벅에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양아치는 반쯤 정신을 잃어 있었고 아랫턱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분노에 부르르 떨며 험악하게 굳어있던 버키의 얼굴이 스티브에게 닿자 어린아이처럼 흐물거리며 풀어진다.
『스티비 괜찮아? 어떡해 얼굴이 피범벅이야...』 『난 괜찮아.』 『괜찮긴! 그러니깐 사라 아줌마 일 있음 꼭 나랑 같이 가자고 했잖아!』
그 전에 네 얼굴도 피 묻었어. 작게 중얼거리는 스티브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만 건지 그저 손수건을 꺼내 스티브의 얼굴을 닦아 줄 뿐이였다. 버키는 당장 사라 아줌마에게 가자며 재촉였지만 스티브는 이미 뻗어 쓰러진 양아치를 엎을려고 낑낑 거렸다. 결국 한숨을 쉬며 자기 손으로 두들겨 팬 양아치를 엎고 간 것도 버키였다.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중얼 거리는 그 표정이 어릴 적 버키 반즈가 보이는 것 같아 머쓱한 웃음을 보일 뿐이였다. 양아치를 챙긴 건 자신의 착한 성미 때문이 아니였다. 길거리에 냅두면 쓰러져 죽어버릴까 그게 무서워서 였다. 자신 때문에 되려 버키가 곤란해질까 그게 무서워서 그런 것이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다행히 어머니는 위험한 순간을 넘겼는지 되려 쥐어 터진 스티브를 보며 이 나이 먹도록 쌈박질이냐며 화를 냈고 그런 스티브를 옹호하고 감싸 준 것도 버키 였다. 뒤로 안아주 듯 감싸는 버키의 등을 보며 스티브는 잡음 많은 심장이 내 발 달린 망아지가 맞는 듯 방망이 짓을 끊임없이 느꼈다.
말썽 많던 심장이 그때 부터 그랬던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스티브는 단박에 No라는 말을 외칠 수 있다. 스티비이이잉~ 한두살 먹은 아이처럼 칭얼대는 소리를 내며 버키는 덥석 스티브의 어깨에 기댄다. 평소같음 체중을 실어 앉지 않던 버키였는데 버키가 기댄 부분에 온 몸이 휘청거렸다.얼마나 마실 건지 얼굴이 벌게지며 코롱향과 섞인 체향 보단 술냄새가 먼저 느껴지는데도 버키는 흔들거리는 손으로 벌써 두병째 럼주를 자신의 잔에 따랐다. 결국 그 꼬락서니를 못 보겠다는 듯 술병을 집어 든다. 어어?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는 버키를 유인하 듯 거실 겸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심하게 비틀 거리지만 아직은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는지 버키는 왜애? 하면서도 잘도 따라온다. 어눌해진 그 발음이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이 괜히 떠올리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정도면 나도 중증이다 정말." "으으응? 뭐가?"
술독에 빠진 와중에 또 스티브의 말은 캐치했는지 평소처럼 고개가 스티브를 향해 숙여진다. 숙여지다 못해 결국 버키의 고개가 빼빼마른 스티브의 무릎에 고개를 처박았다. 우와. 뜨거운 버키의 숨결이 허벅지 부위에 닿자 자기가 술이라도 들어간 듯 스티브의 온 몸 열이 오르고 심장은 축제라도 연 듯 북소리를 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스티비 무릎 배는 거 오랜만이다" "그...렇네" "어릴 땐 걸핏하면 이렇게 무릎에 누웠었는데..."
왜 안 누웠더라? 늘어지는 버키의 목소리는 술기운과 졸음이 가득했다. 아... 마지막 물어보는 버키의 목소리에 그 이유가 곧바로 떠올렸다. 원인은 자신이였다. 그때는 아마 이제 미들 스쿨에 들어갈 즈음 되던 버키는 날로 키가 커졌고 근육이 붙였다. 점점 성인이 되어가는 버키의 모습에 옷들은 날로 맞는 것들이 없었고 그 옷들은 많은 동생들이 입다 결국 스티브에게 까지 물러 입을 때였다. 그 모습에 스티브는 혼란스러웠다. 날로 언제는 비슷했던 눈높이가 이젠 고개를 살짝 들어야지 자신을 따스하게 보던 깨끗한 청회색을 담을 수 있었고 스티브가 어깨에 손을 올리기 보단 버키가 더 많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포옹을 해왔다. 명화 속에 보던 큐피트처럼 오동통한 뺨도 날로 갸름하게 변해 숨어 있던 각진 턱이 보이던 시절.
그때부터 잡음 많던 심장이 요동치며 자신을 보며 활짝 웃던 버키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던 자신을 발견할 때였다. 반에서 예쁘다던 여학생도 쟨 버키처럼 속눈썹이 적네. 버키처럼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네. 버키처럼 입술이 분홍색이 아니네. 하며 같은 성별의 버키를 두고 여자아이들의 외모를 비교하던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였다. 그때의 스티브는 자신의 마음을 몰랐고 언제 생긴지 모르는 '짝사랑'이란 병마를 발견하지 못할 시절. 아직 배울 것이 많던 어린 자신은 알레르기성 두드러기가 올라 왔던 어린 시절 처럼 버키에 대한 짝사랑에 대해 낯설어 하고 두려워 했으며 그러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였다. 그렇기에 그때 스티브는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버키를 거부했던 시절이였다.
『야 스티비!』
자신이 없는 사이에 목소리는 또 언제 낮아진 건지 점심시간, 버키가 찾아 올 즈음 빠져나간 교실 복도에서 떡하니 마주하자 볼 것도 없다는 듯 뒤돌아 뛰어가는 스티브를 다급하게 불러세우던 버키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 귓볼이 뜨겁게 달궈졌다. 비슷했던 발걸음도 뒤 따라 들리는 발소리가 더 무거워져 있었다. 이대로 변하지 않는 건 자기 혼자일까? 덜컥 휘몰아치는 공포감을 벗어나기 위해 결국 스티브의 발은 뛰는 것을 선택했다.
『왜 자꾸 피하는데!야!』 『손대지마!』
안타깝게도 스티브는 얼마달리지 못해 쑥쑥 잘 자란 버키의 손에 잡혀버렸고 그 걸 피하기 위해 팔을 휘둘르자마자 볼품없이 나자빠질 수 밖에 없었다. 씩씩, 넘어질 때 얼굴부터 맞았는지 코가 뜨거웠고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일어날려고 볼품없는 팔에 힘을 주지만 능숙하게 누군가가 자신을 바쳐 일으켰다.
『대체 왜 그러는거야?』 『... ...』 『...내가 뭐 잘못했어? 응?』 『... ...』 『미안해. 화내지마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 ...아니야』
주륵주륵 코피를 흘리는 스티브를 위해 버키는 아침마다 엄마가 잘 다려준 체크 손수건을 꺼내 코밑을 닦다 막아줬다. 혼자 화를 냈다 짜증을 냈다, 결국 아무런 말 없이 뚱하니 있자 엄마 앞에서 혼 난 어린애처럼 수무룩해져선 뭔지도 모르고 미안하다고 사과해온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런데?』 『... ...』 『스티비... 말을 해줘야 알지 내가.』 『그...예전에 내 무릎에 누웠을 때말이야』 『응? 언제? 하도 많아서 기억이 안나네』 『있어 그때,그때 말이지...』
왜 그때 어머니를 만나러 온 아줌마의 말이 떠올렸던 걸까? 스티브는 입술을 달싹이며 건실한 기독교인 이였던 아줌마의 말이 다시 이명처럼 들려왔다.
『우리집에 찾아 왔던 마리아 아줌마 기억해?』 『그때가...아~ 토요일 날 말하는 구나』 『응...그때 너 가고 나서는 우리보고 불경한 짓을 저질렸다고 하더라고...같은 성별끼리 어떻게 한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냐면서...한 동안 피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도 스티브는 왠지 모르게 입안이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망설이면서 하나하나 말하던 스티브는 결국 숨소리도 안내는 버키를 알고 슬쩍 눈을 돌리다 긴장으로 여러 잡음을 내던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걸 짦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이였다. 다소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던 버키의 얼굴은 충격으로 한방 맞은 것 같더니 점점 슬픔으로 변질 되어 가다 평소 장난스러웠던 표정으로 억지로 덮을려는 변화를 스티브의 벽안엔 느린 모습으로 천천히 상흔을 남기며 들어왔다.
『...그래...그랬구나』 『... ...』 『뭐야...결국 나 때문이였네. 내가 상처받을까 봐 거짓말 했구나?』 『... 그게 아니야』 『...기분 나빴지? 미안해. 다음부턴 조심할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데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오히려 항상 예쁘다고 생각한 청회색 눈동자가 고인 눈물 때문에 더 반짝거리는게 스티브의 마음을 찢어놓는 것 같았다. 그때 처음으로 자신이 버키를 울렸다는 충격에 스티브의 몸은 당연히 버티질 못하고 3일 밤낮으로 앓아 누웠다. 익숙하디 익숙한 침대생활이였지만 그 날만은 특별했다. 고열로 터질 것 같은 머리로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어야 했는지 왜 버키가 떠나는 것을 이토록 두려워 하는지 왜 자신은 버키에게 상처까지 줘야 했었는지 모든게 스티브를 괴롭히고 천천히 버키를 향한 '짝사랑'이란 병마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감정을 받아드린 자신은 아직 열이 체 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무슨 정신으로 나갔는지 비틀거리며 두 다리를 일으켜 버키 집 앞까지 갔던게 기억이 난다. 아마 자신은 살기 위해서 그 몰골로 버키의 집으로 간 것일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 때 비명을 지르는 반즈가 막내 동생의 목소리와 다급한 발소리, 그리고 엉망으로 일그러져 두 눈이 퉁퉁 부은 버키를 보며 미안하다고 나 버리지 말아달라는 말을 끝으로 이틀내리 기억이 없었다.
"그땐 진짜 바보 같았지" "으응?"
그래 바보 같은 짓이였다. 이렇게 마음껏 술취해 헤롱대는 버키 반즈의 머리카락도 쓰담아 보지 못하고 마음껏 얼굴 구경도 못했으니깐 말이다. 이 귀한 걸 왜 하필 그 순간에 말해 가지곤, 한심했던 지난 날을 간단하게 결론 내리며 스티브는 자기 손바닥에 고양이 마냥 머리통을 비비며 기분 좋다며 중얼대는 반지르르한 브루넷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 가득 헤집었다. 그게 그렇게 좋은지 버키는 술에 취해서도 활짝 웃으며 스티비이이이 하며 눈을 반쯤 접어 웃는다. 심장이 또 말썽을 부린다. 확실한 건 스티브 로저스는 버키의 미소를 사랑한다. 다른 사람이 풍기면 지독한 술내까지 버키가 풍기면 나름 좋은 향기였고 담배연기가 보이면 눈쌀을 찌푸르며 당장 멀리 빙돌아 갔었지만 자신을 기다리며 잠깐 담배피던 버키의 모습은 누가 봐도 반할 정도로 멋있었기에 나가지 못하고 지켜보며 나중에 스케치북에 그릴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안 있음 생일 돌아오네" "누구우?" "누구긴 제임스 뷰캐넌 반즈씨 생일이요."
다 꼬부라진 혀를 움직이는 그 모습까지 너무 좋아서 스티브는 자연스레 꽁꽁 숨겨둔 장난이 절로 튀어나왔다. 가볍게 높은 코를 자랑하는 버키의 콧볼을 살짝 누르며 대답하자 뭐가 그렇게 좋다고 또 버키가 웃는다. 안먹어도 배부르고 안자도 기분이 좋은게 이런 걸까? 말씨가 절로 사르르 녹는 생크림상태로 변한다.
"그래서 뭐 갖고 싶은 건 있어?" "갖고 시픈거...? "그래 갖고 싶은 거" "... 있다!"
언제 잠들 것처럼 취해 있었냐는 듯 벌떡 일어난 버키는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스티브를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항상 자기 보단 금전적 여유가 없는 스티브 앞에선 원하는 것을 바로 이야기 못하는 그를 이번 기회에 한번 떠보기 위해 말했던 것인데 쉽게도 대답해왔지만 그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스티브를 지긋히 쳐다본다. 여전히 술독에 들어간 듯 눈이 살짝 풀리고 피부가 벌겠지만 표정만은 한 없이 다정하고 진지하다. 그러더니 점점 다가오는 그림자에 스티브의 눈도 조심조심 깜박여진다. 그리고 떨어지는 입술 위 촉감에 화악 퍼지는 술냄새와 진해진 버키의 체향이 숨쉬기도 힘든 코면서도 버키만의 체향과 술내가 가득 차올랐다. 몇번을 입술 위로 그토록 맛봤으면 싶었던 버키 반즈의 입술을 느꼈고 이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호흡을 나누웠다. 처음인 입맞춤인데도 그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달콤하면서 끝에 전해진 타액에선 쌉쌀한 알콜의 쓴맛까지 전해진다. 언제 감았는지 모를 눈가는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 저절로 눈꺼풀이 떨어지며 깜박이는데 서로의 속눈썹이 눈 밑 아래를 간지럽혔다. 스티브의 심장은 망아지 수준으로 날뛰는 걸 넘어 폭탄이라도 터진 듯 북북 소리를 내며 뛰어댄다.
누가 봐도 녹아 버릴 것처럼 달콤하디 달콤한 미소 끝으로 또 다시 어린아이 투정을 부르며 버키는 덩치를 생각 못하고 자기 몸 절반이나 되는 스티브 몸 안으로 녹아 없어지듯 기대왔다. 새액새액 이제야 잠든 버키의 고른 숨이 스티브의 목덜미를 간지러피며 커다란 손은 영화 속 연인의 품에 안긴 아가씨마냥 다소곳하게 스티브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모든 게 다 스티브가 꿈꾸던 상황이였지만 이제 만개해버린 '버키 반즈를 향한 짝사랑' 병에 스티브는 숨도 못 쉬어 질 것 같았다.
병은 이제 '버키 반즈를 향한 사랑'으로 변해 있었고 이 병은 자신 뿐만 아니라 버키의 마음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기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상은 스티브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것 같았다. 안보이면 속에서 애닳는 그리움이 느껴지고 다른 이와 있음 질투에 눈이 불타오르다 한번의 행동과 한번의 말씨와 한번의 스킨쉽으로 천국에 있다 지옥끝에 몇번이나 떨어지고 그러면서도 결국 웃는 얼굴 한번에 모든 게 다 상관 없어지는 증상 아마 버키의 병은 '스티브 로저스를 향한 사랑'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었다.
퍼벤 전 멸팁버키를 보면 항상 버키시점의 짝사랑만 있어서 한번쯤 스티브 입장으로 써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