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작은 머리통에 종양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작은 몸은 무슨 욕심이 이렇게 많아선...허탈감에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보자 귓가에 스치는 장기들의 이름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위, 간, 소장, 동맥,폐,부신 골고루 가지고 있네"
"어떻게...증상하나 보이지 않았지?"
"증상은 있었어. 알잖아"
몇번이나 콜록거리며 토하던 붉은 핏줄기가 선명한 낙인처럼 떠올랐다. 그저 혈청의 부작용이나 지긋지긋한 천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또다른 절망감에 정신을 못차리는 윈터 솔져의 모습에 모순된 감정들이 올라왔다. 역겨움과 안타까움.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몸서리 치며 토니는 시끄러울 정도로 요란하게 차트를 책상 위로 떨어 트렸다.
"정신차려 이제부터 시작일테니깐"
"...스타크"
"한 번 밖에 이야기 안할 거니깐 잘 들어.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나나 부르스는 지금 저 것들의 어머니가 혈청이라고 예상하고 있어. 여태까지 가슴만 답답한 통증과 피만 토했겠지만 이번엔 온 몸이 어마어마한 통증으로 찾아올거야. 일단 암 재활치료로 넘어 갈거고 방사선 치료부터 시작할거니깐 여기로 먼저 들렀다 오기로 해. 혹시 모르니깐 약물투여는 더 높힐 거니깐 30분에 한번씩 놓고"
신랄한 말을 끝으로 버키의 손바닥엔 작은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거기엔 전화번호와 주소 하나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아마 스티브가 치료 받을 암병동일 것이다. 이를 꽉 물며 고맙다는 말을 읎조리며 나갔다. 성큼 성큼 걸어가는 버키의 발이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빨라진다. 이 한순간에도 스티브의 숨은 점점 꺼져만 가는 것 같아 다리가 후들거리는게 느껴졌다.
"...어 왔어?"
"스티비!"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이제는 익숙한 피비린내가 버키를 반겼다. 둘둘 말린 휴지가 씨뻘겋게 젖어가도록 스티브의 오똑한 코는 쉼없이 피를 흘린다. 헐레벌떡 들어와 가방을 뒤지던 버키의 손에는 티슈 뭉치를 꺼내 피범벅인 스티브 손을 치우고 자신이 대신 막아준다. 이미 손바닥 뿐만 아니라 흰 면티와 따뜻한 담요색은 검붉은 스티브의 피로 얼룩덜룩였다.
"왜 혼자 있었어! 로마노프나 윌슨을 부르지 하물며 나라도"
"어쩔 수 없었어. 두 사람이 호출 되고 얼마 안돼서 터진거야. 그리고 핸드폰을 봤는데..."
조근 조근 퍼지던 목소리가 점점 말을 아낀다. 무서운 예감이 스믈스믈 안개처럼 퍼져나간다.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70년 동안 얌전히 있는 버키 반즈가 머릿속에서 애타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마음을 떨어지는 낙엽잎처럼 가볍게 뭉게버렸다.
"하나도 기억이 안났어."
"... ..."
"지긋지긋 할 정도로 아팠던 어린애였을 때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옷 갈아입자. 이럴 줄 알고 옷 챙겨 왔어"
어쩐지 가방이 크더라. 장난스런 그 목소리가 불안에 벌벌떠는 버키의 마음을 달려볼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눈물들이 눈씨울을 뜨겁게 만들며 비집고 나올려는 것을 버키는 어떻게든 눌러담을려고 노력했다.
"자 만세 해 봐. 스티비."
"응...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어?"
"...여...전하지. 맞아 혈청 많이 떨어졌대. 이제 좀 숨쉬기 편할거야"
그거 좋네. 다 알고 있다는 듯 평온하게 웃는 둥근 눈매가 여상스럽다. 모르는 것인지 아님 서투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주는 것인지...확실한 건 이 웃기지도 않는 연극놀이에 버키도 동참하는 듯 어떻게든 입꼬리를 올리며 하늘빛 스웨터를 입혔을 뿐이였다. 촘촘하고 두꺼운 스웨터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품이 너무나 넉넉하다. 혹시 모르니깐 30분에 한번씩 주사 맞으래 괜찮지? 입에 발린 달콤한 말이 절로 튀어나오며 가슴이 꽉 조여온다. 마주 본 야윈 얼굴이 천천히 풀어져 간다. 그리운 만큼 보고싶지 않던 얼굴이였다.
그 소꿉장난은 우스울 정도로 그날 밤에 끝이 났다.
쿨럭! 쿨럭!컥! 발포하는 폭탄세례만큼 붉고 붉은 핏덩이들이 스티브의 입과 코로 통해 튀어나왔다. 이 밤이 짙어지면 짙어질 수록 피들이 앞다투어 스티비 몸 밖으로 빠져 나간다. 입을 막는 두 손사이로 흐르는 핏줄기와 온 집안을 가득채우는 비린내에 당장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이 전신을 때린다. 하지만 몸은 전혀 그렇지 않는듯 반쯤 기절해 축 처진 앙상한 스티브를 들고 달렸다. 자동차를 탄다는 생각도 전화를 해야한다는 선택지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생각나는 건 아까 낮에 본 한 줄의 주소지 뿐였다. 운동화도 아닌 실내화를 신고 달리는 발바닥은 어디 걸러 버린건지 반쯤 찢거 날아가 있었다. 시체처럼 가늘고 앙상한 그 몸이 당장 죽을 것같아서 터져버린 피처럼 흐릿한 시야 속에 도시의 반딧불이처럼 아롱아롱한 밤거리를 달리고 또 달렸다.
들이닥친 병원 안에서 드디어 포효하는 짐승처럼 의사를 부르고 간호사를 불렀다. 앞다투어 튀어 나온 흰가운 사람들이 마치 새하얀 나비들 같다. 넋이 나간 버키를 불렀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피를 울컥울컥 토하며 침대 위로 실려가는 스티브만이 느리게 멀어져 갈 뿐이였다. 자신을 버려두고 멀리 사라져가는 공포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듯 눈 앞이 까묵한 기분이다.
야밤의 그 난리를 겪고 나자 누군가 던진 신문 한 면이 시야에 떨어졌다. 사람을 죽인 윈터 솔져 란 문구가 눈앞에 보였다. 잘하는 짓이라면서 화를 내는 스타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버키의 신경은 온통 혼수상태의 스티브에게 쏠려 있다.
"누가 네 뒤치닥거리까지 해줄 줄 알아? 네 알아서 해. 내 도움 생각하지 말라고"
"... ..."
"이봐 솔져. 듣고 있어?"
"스티브가 깨어나지 않아..."
열받음에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분노가 빠르게 식어버린다. 할말이 있다는 듯 달싹거리던 입을 그냥 다시 다물었다. 몇날 며칠이 지나고 나타샤 나 샘이 찾아왔지만 버키는 망부석처럼 그저 스티브 옆을 지켰다. 쓰러진 스티브는 가끔 눈을 뜨면 헛소리를 해왔다. 아파 아파. 버키. 버키. 어디있어 버키? 안돼 그러지마. 안돼 하지마. 누구를 향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누구를 위해 이렇게 애원하는지 70년 간 흐르지 못했던 눈물들이 이제는 마르는 날 없이 흐른다.
"Hi 반즈"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자신 다음으로 스티브 옆을 지켰던 그녀가 서있었다. 그렇게 자랑하던 붉은 입술도 물결치는 머리카락도 왜이렇게 힘없이 매말라 보이는 걸까. 스티브의 병이 모두에게 퍼져나가는지 그녀의 누드 톤 입술이 어색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건냈다. 깨끗한 블랙 수트 한 벌이였다.
"이게 뭐야?"
"저번에 기사 난 거 기억하지? 토니랑 트찰라가 막을려고 했지만 결국 여론이 들고 일어나서 말이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반즈 니가 스스로 해명해야 할 것 같아. 그냥 내일 기자들 앞에서 스타크 변호사가 준 연설문 읽고 내려오기만 하면 돼."
"그럼 스티비가..."
"이봐 반즈. 나랑 샘을 너무 못믿는 거 아니야? 이래봬도 당신 없을때 우리가 스티브 옆을 지켰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의 입에선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에 버키는 더이상 버티지 못해 물러설 뿐이였다.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스티브가 쓰러진게 늦가을 무렵이였는데 병원 밖으로 나간 세상은 차가운 칼바람이 부는 초겨울 이다. 나타샤가 준 양복 한벌만 입기엔 살이 아리는 날씨일 텐데도 와칸다 국왕이 대기 시킨 자동차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오랜만에 찾아 간 스타크 타워 아래는 윈터 솔져를 끄집어 낼려는 팻말과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는 기자들이 한 무더기다. 자동차 넘어 바라보는 그 짦은 순간인데도 모든게 다 티비 속에 일어난 뉴스만큼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알맹이는 오직 저 멀리 8km 떨어진 암병동에 누운 스티브 곁에 머물고 있었다.
"대체 한달 전에 밤거리를 걸어다닌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고 달렸던 남자는 무슨 관계 이십니까?"
"아직도 하이드라에게 이용 당한 것입니까?"
"지금 캡틴 아메리카는 어디 있습니까?"
캡틴 아메리카란 단어가 귀에 들어오자 드디어 현실이 머리체를 잡아 당긴 기분이 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70년 기억 중 그나마 선명했던 포화 빛처럼 번쩍거리는 플래쉬 빛들이였다. 찰칵찰칵 하는 소리가 마치 윙윙 쓰레기에게 꼬인 파리같았다. 쓰레기...떠오른 글자처럼 저들에겐 자신은 쓰레기 였다. 그럼 이 쓰레기가 재활용이 되는 쓰레기라는 걸 밝혀야하는 것인데...이미 몇분을 멍하니 까먹은 지금의 모습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눈을 몇번 깜박이며 단상 위에 있는 종이를 바라봤다. 친해하는 여러분. 20xx년 xx월 xx일에 일어난 사건을 말하기 위해 이자리에 섰습니다.
"그때 제 품에 안겨 있던 인물은...옆집에 살던 이였고 다른 지역으로 올라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가던 청년이였습니다."
"청년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환자의 모습이지 않았습니까?"
"그 청년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와중엔 캡틴 아메리카는 어디 있었습니까? 지금 캡틴 아메리카는 어디 있죠? 뉴 어벤져스가 결성 된지 1년이 넘어가는데도 아무도 캡틴 아메리카를 본 적 없다는 증언들이 나왔습니다. 그는 어디있죠?"
"두달 전에도 그 청년과 함께 같이 다녔다는 걸 목격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대체 누구죠?"
벌떼같은 그들의 말이 독침으로 박혀온다. 이제는 점점 1년 가까이 잠적해버린 캡틴 아메리카에 대한 질문들만 쏟아져 내려왔다. 아. 세계 모든 사람들도 스티브가 필요하다. 재활용 쓰레기든 구제불능의 쓰레기든 이들은 자신따위 궁금한게 아니였다. 오직, 이 나라의 별을 단 영웅을 필요해 한다. 그들을 향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당장 이 모든 것들을 토해낼 것이 뻔했다. 지금 당신들이 말하던 캡틴 아메리카는 죽었습니다. 제 곁에 있는 이는 내가 너무도 너무도 사랑하는....
툭
투둑
플래쉬 소리와 어느 새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 소리만 들렸다. 두 손이 망가질 것처럼 주먹을 꾹 쥐고 터질 것 같은 애원을 대신해서 흐르는 눈물을 버키는 닦을 생각을 못했다. 당장 수많는 이들에게 소리치고 울고 애원하고 싶었다. 속수무책으로 스티브를 데려가려는 운명을 무찔러 달라고 그거면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다고 자신의 앞에서 칼을 들이대는 대중들에게 소리쳐 울부짖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당장 돌아 갈 그 병동에 다시 건강한 스티브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무모한 행동이 튀어 나오기 전에 이것으로 기자회견을 마치겠다는 말과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손길을 받으며 휘청거리며 걸었다. 스티브가 깨어났어. 차로 이동할 즈음에 들린 누군가의 목소리에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슬픔에 간신히 깨어났다.
"버키..."
문을 열고 들어간 병실은 언제 피비린내와 소독약만이 진동했냐는 듯 오랜만에 커튼을 친 병실 가득 햇살이 들어왔다.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잘 익은 이삭으로 물든 것 같은 금발이 황금처럼 반짝거린다. 스티비. 울음소리 하나 내지 않던 목소리였지만 처참할 정도로 깊히 잠겨있다. 마치 자신의 슬픔처럼. 언제 또 살이 빠졌는지 잔떨림이 보이는 길고 가늘디 가는 손이 버키를 향해 뻗는다.
"이리와."
"....어젯밤 잘 싸웠어 jerk"
스티브의 승리를 축하는 멘트가 이토록 서글픔을 가지고 있었다. 스티브와 함께하면 익숙했던 것들도 모두 새로웠다. 그 서글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티브는 모든게 좋은지 방긋방긋 미소 지은다. 그 따뜻하고 포근한 미소와 다르게 맞잡은 손이 참으로 차갑다. 어쩜 그것마저 눈씨울이 뜨거워 지는 것일까. 버릇이 되버린 눈물들이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지금의 버키 반즈는 입꼬리를 올리는 일 밖에 없다.
"버키..."
"응."
"나 정말 잘 싸웠던 거면...내 소원하나 들어줄래?"
속삭이는 그 목소리 마저 너무 포근했다. 숙여진 귓가에 스치는 그 숨이 아직은 죽을 수 없다는 증거 같아 버키는 계속해서 귀를 맞대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던 그 목소리. 그 목소리만 들으면 자신또한 말하는 혀 끝이 유난히 부드러워지고 나긋나긋해졌다.
"그래. 말 만해 이 형이 다 해줄게"
"나...오랜만에 깨어나니깐 하나 생각 났어. 그랜드 캐니언 기억 나?"
엉망진창인 뇌는 유일하게 스티브와 함께한 기억들만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랜드 캐니언. 처음 신문배달로 일을 했을 때 한 면을 장식하던 장활한 계곡들의 향연에 첫 신문을 가지고 스티브에게 보여줬던 틴에이져 시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고개를 끄덕이기 전, 의아함을 가지고 바라보자 스티브의 눈이 느리게 깜박인다.
"거기...처음 보고는 나랑 꼭 같이 가기로 했잖아....그래서 액자로 걸어놓았고..."
"...그랬지."
"지금 가자."
생생하게 빛나는 초록빛 벽안이 당황으로 물든 자신을 가득 담는다. 황당과 당황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생기있는 스티브를 보자 어쩔 수 없이 보이는 안도감까지.그랜드 캐니언으로 가자.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와 맞잡은 손에 들어간 힘때문에 버키는 꼼짝 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난 13살 때부터 버키 반즈는 약골 스티브를 이긴 적이 없었다.
**
그나마 흔들거림이 적으면서 빠른 헬리캐리어 안에서도 스티브는 힘이 보채는지 그랜드 캐니언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잠들어 있었다. 그 옆에 버키는 한 순간도 눈을 떼지못했다. 가끔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던가 역류하는 피 때문에 호흡을 못하는 스티브를 위해 자신의 옷이 씨벌겋게 젖어 갈때까지 버키는 몇번이고 스티브가 편할 자세로 안고 버티었다. 가끔씩 또다시 하지마 하지마 안돼. 하고 헛소리하는 스티브를 위해 모르핀을 놔줄 뿐이였다. 그런 스티브의 모습을 따라 올라탄 배너박사는 고개를 돌려버린 나타샤를 달랬고 눈이 시뻘개지도록 밤을 지새는 샘은 버키를 도와 피로 얼룩진 스티브의 옷을 갈아입혔다.
하늘이 붉게 물든 노을이 되서야 그랜드 캐니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문을 닫은 후버 댐은 토니가 어떻게 수를 썼는지 헬리캐리어가 도착해도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오랜만에 휠체어에 스티브가 올라탔다. 매서운 강바람에도 스티브의 눈이 반짝거렸다. 잘 다녀와. 자신 만큼 불안감이 가득 든 나타샤의 목소리를 안고 두 사람은 후버 댐 위를 걸었다. 모여있던 햇살이 즙처럼 터진 것처럼 따뜻한 노을이 지고 있다.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바다보다 더 짙고 푸른 후버 댐 위에 서서 푸른 물을 바라본다. 뭐든게 저기 휠체어에 앉은 스티브의 색이였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이 순간이 왜이렇게 서글픈 건지 눈씨울이 뜨겁다
"너무 예쁘다"
황홀경에 빠진건 버키 뿐만이 아니였는지 가늘게 퍼지는 스티브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상하지? 어느 순간 부터 세상 모든 게 아름다워. 지는 해도 푸르게 펄쳐진 물도 황금빛 하늘도 바람도...예전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어"
"... ..."
"왜, 이제야,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일까..."
"... ..."
감탄어린 그 목소리가 너무 아롱거린다. 모든게 아름답다며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왜이렇게 가슴을 미여지게 만드는지 한 점의 그림을 그리듯 중얼거리는 스티브의 말을 버키는 자신의 울음으로 더럽힐 수가 없었다.
"여기 오길 잘했다 그렇지?"
"... ...응"
"살아있길 잘했어. 살면서 몇번이고 숨쉬는 게 힘들었는데...지금보니 역시 100살까지 살아있길 잘한 것 같아. 이젠 후회 없어"
"흐흑..."
결국 모든 것들을 망쳐 버렸다. 한번 터진 울음이 허물어진 댐처럼 버키의 입 속에서 빠져나간다. 70년 전 부터 누구보다 튼튼하고 건강한 버키 반즈를 스티브는 너무도 쉽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너트렸다. 지금도 그때처럼 무너져 내리는 가슴만큼 내려앉은 가슴을 움켜쥐며 그 앙상한 두 다리를 감싼 담요 위로 고개를 파뭍었다. 눈물은 비바람처럼 계속해서 쏟아진다.
"왜그래? 나 괜찮아"
"흑,흐으, 내가, 내가 죽어야 하는 건데, 흑 내가 죽어야 하는건데..."
"버키..."
"벌 받는,거야,흑,내가, 흐으윽,흑,하아-,사람을, 많이 죽여서, 흑, 그래서,스티비 니가"
"아니야. 그런 말 하지마."
"그럼 왜 네가 죽어야 하는건데!!"
바스라질 것 같은 그 몸에 매달려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내질렀다. 처음 예수를 만난 병든 이처럼 각각 다른 손은 몇번이고 죽음이란 세계로 도망칠려는 스티브의 몸을 붙잡으려 더듬 거렸다. 상냥한 그 목소리에 결국 추하게 더럽혀진 얼굴을 들고 벼락같은 목소리를 내질렀다.
"앞만 세상이 아름다우면 뭐해! 스티비! 네가! 죽는데!네가 없는데!"
"... ..."
"그게...다 무슨 소용인데...흑"
단 하나, 세상에 단 하나만 원했을 뿐인데...그것마저 가져 갈려는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살아가는 나날이 눈알이 타는 듯한 수치심 이였고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 뿐 이였다. 그 세상에서 유일한 안식처가 지금 속절없이 사라 질려고 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아무리 암살자로 70년을 살았다 해도 다 부질 없는 짓 이였다. 버키는 자신을 향해 꾸짖듯 혹은 저 하늘 위에 있는 신이란 존재에게 7살짜리 떼쟁이처럼 울음 범벅의 발악을 내질렀다.
"스티비, 흑,스티비 이렇게 빌게 응?"
"... ..."
"내,내곁에 흐으, 내곁에서 살아만 줘, 제발, 부탁이야,흐으윽, 난 너 못 보내,너 없이, 나 혼자 어떻게 살아? 응? 나 버리고 가지마 응? 제발 부탁이야 스티비, 내가 다 할게 뭐든 할게 그냥 내 곁에만 살아줘"
"... ...벅"
"누군가를 구하지 않아도 좋아.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아. 걸어 다니지 않아도 돼, 말하지 않아도 돼 내가, 응? 내가 다 할 테니깐 제발 내 곁에 살아만 있어줘"
"... ...버키"
"그냥 내 곁에만 이렇게 있으면 돼. 내가 보기 싫음 영원히 사라져 줄게. 난...난 멀리서 너만 바라보면 되니깐...그냥 지금처럼 살아만 있어줘 제발..."
뭐든 걸 발가벗은 것처럼 속내를 털어놓았다. 평생을 잃어버리는 이 슬픔이 스티비에게 닿길 바라며 이미 울음바다가 된 담요 위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릴 뿐 이였다. 아무런 말 없이 그런 버키를 묵묵히 바라보던 스티브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엉망으로 자라버린 브루넷을 살살 쓰담 더니 조용히 자신의 품으로 당겨 안아줄 뿐 이였다.
"그만 울어.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나자 응? 보고 싶음 내가 언제나 꿈에서 찾아 올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흑...그런 거 몰라 지금, 지금 내 곁에 있어줘 스티비이..."
퍼지는 노을과 푸른 후버 댐. 참으로 그림 같은 이 장소에는 떠나려는 한 사람을 붙잡는 울음만이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자신때문에 70년 만에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 소중한 이의 품을 느끼며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그 초록빛 벽안도 안타까움을 가진 눈물 한 줄기를 흘린다.
이별은 착실히 다가왔다.
스티브의 몸은 결국 혈청도 암도 모두에게 저버렸다. 약물을 투여하는 것 자체가 쇼크사로 온다는 말을 듣고 버키는 다시 서로가 같이 의지하고 살던 브루클린의 작은 플랫으로 돌아갔다. 둘은 드디어 집에 돌아온 듯 함께 눈을 뜨고 함께 눈을 감았다. 눈을 뜬 스티브는 예전처럼 버키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그 순간순간 비둘기를 따라 뛰놓는 아이들 주인과 함께 공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를 그렸다. 당연하게도 그 그림들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웠고 버키는 언제나 보던 스티브의 그림을 보며 자신의 어휘력이 얼마 안되는 것을 한탄해했다. 그렇게 걸어가다 추운 날씨 덕분에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집으로 들어와 응접실 바닥에 집 안에 있는 쿠션들을 깔고 누워 책을 읽던가 함께 노래를 들었다. 가끔 찾아오는 샘과 함께 식사를 했고 잠이 들때는 둘이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수다를 떠들다 잠들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잡은 오른손이 너무 떨려서 동그라미 몇개 밖에 못그린 것도 온 몸가득 찬 병마 때문에 물하나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 것도 얼마 걷지 못해 피를 쏟아내는 스티브 때문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던 것도 혼수상태로 사경을 해메는 스티브의 모습에 몇번이고 샘과 의사들이 찾아 온 건 아무것도 아니였다.
"맛있었어? 스티비?"
"응....오늘 만큼...좋았으면 좋겠다."
이상한 하루였다. 하루에도 몇번이고 각혈을 하던 스티브는 피 한방울 토한 것도 없었고 오금을 다 망가트리던 통증도 스티브를 괴롭히지 않았다. 힘들어하는 내색 없이 드디어 사람다운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고 떨리던 손끝도 멀쩡했다. 버키는 갑자기 건강해진 듯 모든 행동이 사라진 스티브를 보며 감격에 겨운 전률을 느꼈다. 드디어 기적이 찾아 온 것일 것이다. 그렇게 말썽을 부리던 혈청이 다시 재 기능을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 타워로 달려가 검사를 하고 싶었지만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스티브의 모습에 버키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이 순간을 즐겼다. 드디어 퍼지는 안도감과 이 것을 밑거름으로 다시 건강하길 바라는 소망이 가득 차오른다.
"만약 다시 건강해진 거면....우리 당장 퇴역하자."
"버키..."
"그리고 하고 싶은 것 다 하자. 나도...더이상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은은한 스텐드 조명을 따라 퍼지는 스티브의 눈이 졸린 듯 꿈벅거리다 마지막 버키의 말에 반짝 떠졌다. 버키는 오랜만에 진심어린 미소가 입술에 걸렸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해놓고...먼저 어겨서 미안해."
"아니야. 나도 그랬는 걸"
"이제 평생 함께하자. 스티비"
"그래...그러자 버키..."
잔잔히 퍼지는 미소와 함께 둘은 아무 것도 모르고 함께 했던 즐거움만 알았던 어린 시절의 미소를 달고 함께 잠들었다.
그것이 마지막 이별의 순간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
"스티브 일어나 봐"
눈물이 아롱아롱 차올라 떨어진다. 겨울 하늘 답지 않는 환한 햇살 속에서 몇번이고 사랑해 마지않는 금발을 쓰담고 또 쓰담았다. 큭, 흐윽 흐...퍼지는 울음을 삼킬려고 하지만 이미 엉망진창으로 쏟아지는 슬픔들이 결국 고요하게 잠든 스티브의 얼굴 위로 몇방울 떨어졌다. 길게 호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그 얼굴이 왠지 우는 것 같아서 버키는 떨리는 왼손으로 조심스레 닦아줬다. 겉모양이 같아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고철덩어리 였지만 소름끼치도록 죽음만큼은 잘 알고 있는 손이였다. 그 손에 스치는 스티브의 얼굴은 병아리의 날개짓 마냥 갸날픈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는 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였다. 커다란 덩치에 다 가려지도록 가득 품에 안은 스티브의 몸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영혼이 없는 껍데기는 끔찍히도 싫어하는 차가움에 뒷목이 쭈볏 슨다.
"타워,가는게, 싫어서 그래? 흐으, 나중에...나중에 갈까?"
어떻게든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도 가득 차오르는 슬픔들이 무턱대로 튀어나왔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품에 안긴 스티브를 보듬어도 자기 안에 있는 영혼의 반을 전해주고 싶어도 이미 그 속엔 스티브가 없었다.
"스티비...일어나 봐. 나 오늘 네가 좋아하는 스파게티 만들었어...저번에 먹고 싶어했잖아...내가 못먹게 해서 화났어? "
허공에 메아리 치듯 퍼지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상냥해서, 너무도 아파서 누군가가 들었음 숨이 막혀 밖으로 도망쳤을 것이였다. 하늘 위에 있는 태양의 위치가 바뀌고 찾아오지 않는 두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생겨 찾아온 동료들이 오지 않았음 버키 반즈는 작고 작은 자신의 꼬맹이가 품에 녹아 하나가 될때까지 함께 할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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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이란 시간이 비었지만 저는 마지막까지 정의는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를 등지고 드디어 누울 수 있었습니다. 함께 정의를 이어갈 수 있었던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을 남깁니다.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
한나라의 영웅의 장례식은 요란했다. 그의 장례식을 못간 사람들은 죽어버린 영웅을 애도하기 위한 길거리 행진을 보였고 기자들은 하나의 특종을 찍기 위해 여전히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한 평생 요란한 건 캡틴 아메리카로 충분했던 스티브 로저스의 장례식이 아니였다. 죽어서 까지도 편하지 못하는 구나 넌. 픽 하고 자조적인 웃음이 튀어 나오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었다. 스티브가 죽었으면서 스티브 때문에 자신이 웃었다. 버키는 무너지는 가슴을 느끼며 이제부터 시작인 고통을 간신히 버티었다. 저기 단상 위에 선 스티브의 유언장을 읽는 필 콜슨 이란 인물도 자신 옆에서 눈물을 찍어내는 사람들도 고개를 자신을 따라 삽을 들고 흙은 퍼 담는 토니 스타크와 샘 윌슨도 모두 다 모든게 다 웃기는 드라마 같았다. 꽃들과 함께 한 주먹의 흙들이 떨어질 때마다 버키의 가슴또한 엉망으로 갈갈이 찢겨나갔다. 당장 그 흙들을 걷어내고 굳게 닫힌 관을 열고 스티브를 흔들며 입맞추고 싶었다. 남아있는 자신의 목숨을 다 주면, 그러면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 같았다.
"이봐....반즈"
누군가가 버키를 불러 세운다. 물에 잠긴 것처럼 모든 게 다 일렁이는 것처럼 흐릿한 정신 속에서 착잡한 표정을 짓는 인물이 있었다. 윌슨 같기도 했고 배너라는 박사 같기도 하고 아님 죄를 내릴 권리가 충분히 있는 스타크 같기도 했다.
"콜슨이 유언장을 찾으며 나온 것들이래. 자 받아"
작은 박스 하나를 받았다. 그걸 열자 착착 정리된 편지들이 들어있었다. 주인을 닮아 정갈하고 깔끔한 편지들이였다. 하지만 제일 눈에 띄이는 하나의 종이가 보였다. 편지봉투도 새하얗게 줄이 그어진 편지도 아니였다. 줄도 없는 작은 메모지에 삐뚤빼뚤한 글씨 몇줄이 있었다.
『먼저 가서 미안해...버키...네가 있어서 이 지옥같은 삶을 살 수 있었어. 벌이라고 죄라고 생각하지마. 단 한사람, 나에게 버키 반즈는 축복이였어. 그러니깐 내가 그리워지는 날에 꿈에서 까지 찾아오지 않는 날을 위해 준비했어 내가 다시 찾아올때까지 이걸로 참아줘 -너희 스티비가』
그 한자한자 쓰는데 얼마나 많은 힘이 들었을까...다 말라있다는 눈물들이 한순간에 터져나왔다. 쏟아지는 눈물들이 스티브가 남기고 간 사랑을 적셨다. 서지도 못하고 힘이 풀린 다리때문에 버키는 보기 좋게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저 들끓는 비명소리와 함께 쏟아진 편지를 껴안고 울고 또 울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해 힘을 낸 스티비가 너무 그리워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끊임없는 눈물들이 멈추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